생명과학이나 유기합성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잘 아는 과학 용어가 있다면 바로 이 단어가 아닐까, 저분자. 분자량이 작은 것은 저분자, 반대로 분자량이 큰 것은 고분자인데, 화장품, 식품, 건기식 등에 자주 쓰여서 대중에 익숙한 저분자와 달리, 한 끗 차이의 고분자는 유기 합성이나 석유 화학 쪽 종사자가 아니면 일상 속에서 쉬이 접할 일이 없다. 우리의 화장대에, 욕실에, 냉장고에, 식탁에, ‘저분자’ 물질들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저분자’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 분야들 중 하나가 화장품 업계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저분자 OO’을 그토록 찾을까. 이 이유도 이제는 소비자들이 잘 안다. 화장품 업계에서 저분자로 이용하는 것은 주로 펩타이드, 콜라겐과 히알루론산인데, 이 좋은 것들을 화장품으로 잘만 쓰면 피부에 참 좋을텐데, 본디 분자량이 커서 (고분자) 피부에 침투하고, 효능을 나타내기가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서, 그걸 해결하고자 등장한 것이 덩치가 큰 콜라겐과 히알루론산을 잘게 잘라 피부로 쏙쏙 들어갈 수 있게 해준 저분자화 콜라겐, 저분자 히알루론산이라는 거다. 큰 덩어리는 체를 통과하지 못하지만 덩어리를 잘게 부수면 가루는 체를 통과한다. 체가 피부 장벽이고 덩어리는 고분자 물질, 가루는 저분자 물질이다.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워서 소비자들에 마케팅 하기 좋아서 약방의 감초처럼 쓰인다.

이 얘기를 하자 과학 비전공자인 내 친구 하나는 ‘그러면 무엇이든 잘게 쪼개면 다 화장품 원료로 쓰기 좋아지는 거 아냐?’ 라고 물었다. 그럴까? 답은 아니다. 분자량이 크다고 다 저분자화가 가능한 것이 아니고, 저분자화가 가능한 고분자 물질은 따로 있다. 잘라낸 뒤에도 기능을 하는 구조 단위가 유지 되어야 한다. 펩타이드, 콜라겐, 히알루론산, 이것들의 구조상 공통점은 실에 꿴 진주 구슬 목걸이와 같은 형태라는 점이다. 흔히들 하는 착각이 커다란 진주 한 알을 잘게 쪼개는 게 저분자화라고 생각한다. 화장품 원료의 저분자화는 진주알 수백 개가 엮인 목걸이를 잘게 잘라서 진주 서너 알이 엮인 작은 조각으로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단일 물질 자체의 사이즈가 크다면 (커다란 진주알) 화장품 원료로써의 저분자화는 어렵다. 기능을 하는 단위 하나 자체가 크기 때문이다. 고분자 히알루론산은 보습 기능을 하는 히알루론산 한 조각이 수백 개가 엮여 있기 때문에 그 사이를 잘라준다고 하더라도 그 한 조각은 그대로 남아서 기능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겐 익숙하고 흔한 식재료인 해조류는 최근 영양학적인 우수성이 전해지며 서구지역에서는 미래 식량으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대체 식량 연구 분야에서 새우 등의 해산물 등은 대부분 해조류 추출물을 이용해서 만든다. 해조류는 변화무쌍한 바다의 환경에 서식하며 식물의 특징을 가져 한 곳에 고정되어 산다. 이런 붙박이 생물들이 그러하듯 스스로를 보호하는 물질들을 만들게 된다. 갈조류는 phlorotannin을 만들어 자외선과 이로 인한 산화스트레스로부터 스스로를 지킨다. 1913년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연구진은 갈조류로부터 Fucoidan (후코이단)이라는 물질을 발견했다. 황산기를 달고 있는 당 조각들이 구슬 꿰 듯 줄줄이 이어진 모양새다. 이 물질은 수분을 끌어 당기는 성질을 가진다. 한 국내 연구진의 연구에서는 히알루론산보다 더 높은 보습 효능을 보였다고 한다. 후코이단은 보통 건강기능식품으로 많이들 섭취하며, 특히 암환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우수한 효능이 밝혀져 있는데, 왜 콜라겐이나 히알루론산보다 화장품 원료로 잘 알려지지도 않고 시장에서 많이 쓰지도 않는 걸까.

효능면에서 뿐만 아니라, 고분자의 후코이단은 화장품 제형의 적용도 어렵다. 천연 추출물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듯 다양한 천연 화학 물질들이 섞여 있는 만큼, 추출 이후, 농축, 정제 과정을 통해 제형 안정성을 확보해야 화장품의 원료로 쓸 수 있다. 갈조류에서 바로 추출한 후코이단은 분자량이 크고, 해조류 특유의 점성이 강해서 용해도가 좋지 않다. 이를 개선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저분자화다.

바이오스펙트럼에서도 후코이단을 저분자화 하여 화장품 원료로 개발하는 시도를 했는데 저분자화를 통해 용해도가 월등히 개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포 실험에서 효능도 고분자에 비해서 상당히 뛰어남이 관찰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바이오스펙트럼에서는 하나의 시도를 더 했는데, 수용성 물질인 후코이단을 wax 형태로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제형 기술을 적용하여 만든 원료는 립밤, 립스틱과 같은 무수 제형의 완제에 후코이단의 효능을 적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렇듯 저분자화 기술은 유용한 물질의 효능 뿐만 아니라 제형적인 안정성도 높여 줄 수 있다. 우리의 화장대에서, 식탁에서, 욕실에서 ‘저분자’라는 단어가 자주 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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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사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